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1381년 ~ 1382년 소강기 === [[파일:a6NEN1n.jpg|align=left]]진포 전투의 승리와 황산대첩 이후 왜구의 움직임 역시 이에 충격을 받고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주로 서남해를 중심으로 고려의 조운선을 털어먹던 왜구는 서해안 깊숙히 올라가는데 애로사항을 느끼게 되었고, 대신 동해안을 주로 치면서 내륙으로 진군하여 양식을 확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동해안의 경우 서남해의 내륙보다 평야 지대가 비교적 적은 편이고, 무엇보다 왜구가 심심하면 공격해서 털던 조창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왜구는 동해안을 따라와서 내륙으로 침투하기 위해 애를 썼다. 황산대첩 이후 몇개월 정도 쥐죽은 듯 있던 왜구는 2월 무렵 경북의 영해부(寧海府)를 치는 한편 3월에는 강릉 부근에서 어슬렁거렸고 이후 송생(松生)ㆍ울진(蔚珍)ㆍ삼척(三陟)ㆍ평해(平海)ㆍ영해(寧海)ㆍ영덕(盈德)을 치더니 삼척군까지 불태웠다. 4월에는 지리산에서 도망친 왜구가 [[무등산]]으로 도망친 후 화순까지 이동했는데, 정황을 보면 이들은 황산대첩에서 패배한 후 도망친 잔당으로 보인다. 험한 지역을 이용해 버티던 왜구들은 전라도 도순무사 이을진(李乙珍)이 결사대 100여명을 이끌고 공격하자 달아났고, 이후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으나 나공언(羅公彦) 등에게 추격 받아 거의 죽고 말았다. 5월에는 왜구가 이산수(伊山戍)를 침입했으나 양광도 도순무사 오언에게 격퇴당했다. 그러나 영해부(寧海府) 등이 왜구에게 공격 당했고 경상도 고령군에 큰 가뭄이 들어 여러모로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 와중에 해도만호(海道萬戶) 최칠석(崔七夕) 같은 사람은 멀쩡한 병사 30여명을 집으로 돌려 보내고 그 병사들에게 지급된 군량을 자기 집으로 빼돌리는(!) 신개념 군사 [[횡령]]을 하다 걸려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다. 6월에는 왜구가 비인현(庇仁縣)을 쳤고 영주(永州)를 불태웠으며, 50여척이라는 적지 않은 왜구가 김해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원수 남질(南秩)이 물리쳤고 남질은 이후 영해ㆍ울주(蔚州)ㆍ양주(梁州)ㆍ언양(彦陽) 등지에서 왜구와 계속해서 소규모 교전을 벌여 승리했다. 또 울진현에서의 싸움에서는 권현용(權玄龍)이 적의 창에 맞았으나 힘이 장사였던 권현용[* 하도 힘이 세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만인지적]]이라고 불렸다고 한다.]은 오히려 왜구를 격퇴하고 수급 20여개를 얻고 말 70여필을 노획하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7월에는 왜구가 다시 김해를 노리고 쳐들어왔고, 고성현 역시 공격을 당했으나 이는 남질이 물리쳤다. 9월에는 남질이 지리산에 아직 남아 있던 왜구 패잔병을 찾아 네 사람을 죽였으며, 충남 서산과 경북 영천 등이 공격당했다. 10월에는 왜구가 임하현(臨河縣)을 공격하고 전라도 나주 지역 역시 공격을 했는데 이을진과 지용기가 이를 물리쳤다. 11월에는 보령현(保寧縣)이 공격 당하고 밀성현(密城縣)도 공격을 당했는데 지병마사(知兵馬事) 이흥부(李興富)가 이들 중에 몇명의 목을 베었다. [[파일:Y3W7KGc.jpg|align=center]] 1382년 2월 왜구는 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인 임주(林州)를 쳐서 고려군의 오언이 맞서 싸웠으나 이기질 못했다. 이후 왜구는 부여(扶餘)·석성(石城) 등을 침공했다. 또 [[평해군]](平海郡)도 공격당했다. 3월에는 삼척ㆍ울진ㆍ우계(羽溪) 등의 동해안 지역이 침공을 당했다. 이후 영월ㆍ예안ㆍ영주ㆍ순흥ㆍ보주ㆍ안동 등이 공격을 당했는데 이 지역이 동부 지역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동해안을 통해 침투한 왜구들이 이곳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왜구들은 죽령을 넘어서까지 공격 해 왔으나 변안열 등이 이를 물리쳤다. 여기에 더해 치안의 불안을 틈타 천민 계층이었던 양수척(楊水尺) 무리들이 왜구로 꾸며 영월군을 침공하는 일도 있었다. 5월에는 영춘현(永春縣)과 회양부(淮陽府)가 공격 당했다. 6월 무렵에 이를 경우, 왜구들은 경산(慶山)·대구(大丘)·화원(花園)·계림(鷄林) 등지를 침구하고 또 통구현(通溝縣)을 치는등 경상도 내륙으로 상당히 깊숙히 들어왔다. 즉 장수들이 싸우려고 하질 않고 자기보신만 꿈꾸며 교전을 회피하는 통에 왜구가 활개를 쳐도 제대로 교전도 치르지 못한것. 이에 우왕은 전법판서(典法判書)였던 '''[[조준(조선)|조준]](趙浚)'''을 보내 이를 닥달하게 했고, 조준은 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서 도순문사(都巡問使) 이거인(李居仁) 등을 닥달해 왜구를 격퇴했다. 이에 고무된 우왕은 조준을 다른 곳에서 파견하려고 했으나 조준 본인이 꺼렸고, 정 일을 맡길 생각이라면 더 큰 권한을 주라고 요구해서 흐지부지 되었다. 10월에는 황산대첩이 벌어졌던 남원에 왜구가 깜짝 출현을 했으나 심우로(沈于老)가 소규모 교전을 치뤄 물리쳤고, 50여척의 왜선이라는 적지 않은 규모의 함선이 진포에 나타났으나 이를 정지가 무찔렀다. 정지는 도망치는 왜선을 추격해서 군산까지 가 왜선 4여척을 얻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